전북 울산골닷컴 홍재민

[RED칼럼] 여름밤은 후텁지근하고 우승 경쟁은 끈끈하다

[골닷컴] 전주월드컵경기장 기자석으로 나가는 문을 연다. 끈적한 열기가 몸에 들러붙는다. 생전의 죄를 씻으러 대초열지옥으로 떨어질 때 이런 기분일까 싶다.

킥오프 휘슬이 울린다. 홈팀은 불꽃 대신에 물대포를 쏜다. 기상청 홈페이지에서 ‘전주’라고 입력한다. 섭씨 28.7도, 체감 30.9도, 습도 82%라고 친절하게 표시된다. 이미 충분히 불쾌한 줄 아는데 굳이 숫자로 불쾌지수를 재차 확인해볼 필요가 있었는지 잠시 자문해본다. 그렇다고 더위가 가시는 것도 아닐 텐데. 경기 시작 전까지 두툼한 캐릭터 탈을 쓰고 있던 알바생은 지금쯤 별 탈 없는 걸까? 경기가 시작하고도 머릿속이 무더위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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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서 뛰는 전북현대와 울산현대의 선수 22명은 이미 땀으로 푹 젖었다. 올해도 두 팀은 리그의 맨 앞자리를 다툰다. 2022시즌 들어 울산이 앞선다. 팬들에겐 익숙한 광경이다. 홍명보 감독이 드디어 울산을 일인자로 만들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전임자의 발자국과 닮았다. 지난해처럼 전북은 계속 울산의 등에 코를 박고 열심히 뒤쫓는다. 어두웠던 시즌 출발에서 살아난 덕분에 라이벌과 차이는 현재 6점이다. 물론 세상 일은 쉽지 않다. 타노스가 핑거스냅이라도 했는지 쿠니모토가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그나마 경기를 풀던 플레이메이커가 없어지자 전북의 경기는 더 답답해지는 기분이다. 새 외국인 선수는 비행기 마일리지만 쌓고 돌아간 뒤다.

울산이 킥오프 7분 만에 선제 득점에 성공한다. 전북 벤치는 바로우를 넘어트린 김태환을 가리키며 화를 낸다. 정동식 주심은 원심을 유지한다. 리플레이 화면에서는 엄원상의 볼이 윤영선의 다리 사이를 통과한다. 느리게 보니까 베테랑 수비수의 굴욕이 더 적나라하다. 페널티킥을 놓친 구스타보의 몸짓이 이어진다. 전북 팬들은 심판 꺼지라고, 울산 팬들은 전북 꺼지라고 서로 소리친다. 양쪽 함성이 경기장 한가운데서 충돌한다. 분위기가 달아오를수록 양쪽 서포터즈는 더 껑충껑충 뛴다. 열정을 정량화하는 숫자는 없나? 뜨거운 줄 알면서도 괜히 재어보고 싶다.

하프타임이 되자마자 기자실로 직행한다. 시원하다. 지금으로부터 약 120년 전 미국에서 에어컨이 태어난다. 발명가 윌리스 캐리어의 성을 딴 회사는 지금도 에어컨을 판다. ‘호사유피 인사유명’을 확실하게 실천한 인물이다. 지금 이 순간만큼 나는 캐리어 씨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가 환생한다면 그에게 절할 것이고, 그가 유튜브 채널을 개설하면 매주 슈퍼챗을 쏠 것이다. 캐리어 씨의 선물 앞에서 오래 머물고 싶지만, 후반전이 시작한다. 기자석으로 통하는 문을 연다. 뜨거운 공기가 훅 들어온다. 경기 시작 전과 약간 느낌이 다르다. 홈 팬들의 ‘조바심’이 섞여서 그런 것 같다.

바로우가 멀리서 날아온 볼을 길게 터치한다. 김태환이 가볍게 벗겨진다. 혼전 중 슛이 김기희에 굴절되어 울산 골 라인을 넘는다. 바로우가 힘차게 뛰어오른다. 아침에 어머니의 죽음을 안 선수처럼 보이지 않는다. 저런 집중력이 바로우를 국가대표 선수로 만들었나 보다. 바로우의 분투도 승점 3점을 따기에는 역부족이다. 올 시즌 울산은 확실히 달라진 것 같다. 예전 같으면 뒤집힐 분위기였는데 울산이 끝까지 버틴다. 험악한 막판 신경전 속에서 올 시즌 세 번째 맞대결이 1-1로 끝난다. 1승 1무 1패.

전북 울산한국프로축구연맹

귀가 채비를 마친 이청용에게서 샤워 향기가 난다. 이청용은 “경기 중에 벌어지는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겠다고 대비하는 부분이 좋아졌다”라고 말한다. 지금까지의 울산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 전북에 깻잎 한 장 뒤지는 팀으로 인식된다. 2022시즌 들어 팀 분위기가 그 깻잎을 먹어 치웠나 보다. 단단한 분위기를 만드는 공헌자로 이청용은 “지금 울산에 남아있는 선수들”을 말한다. “다들 출전하지 못해도 싫은 내색 없이 팀이 좋은 성적 거둘 수 있도록 도와준다. 주영이 형, 명진이 형, 형민이 형, 수혁이 형, 호 형처럼.”

밤 10시 반을 넘겨 경기장을 떠난다. 그라운드가 아직 환하다. K리그 우승 경쟁의 잔열이 느껴진다.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관중 동원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최소한, 두 팀의 충돌은 시끄럽고 화려하다. 관중 수가 1만 1천 명에 그치기엔 아까운 매치업이다. 축구의 현장감은 에어컨 바람이 없는 바깥에서만 느낄 수 있다. 후텁지근한 여름 날씨까지 K리그다.

글, 그림 = 홍재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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